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평양 탈환작전 (문단 편집) == 전투 전 상황 == [[9월 28일]] [[대한민국 국군]]과 [[유엔군사령부|유엔군]]이 [[9월 15일]] [[인천 상륙작전]]을 계기로 [[서울]]을 [[9.28 서울 수복|수복(收復)하자]] [[북한군]] 총사령관 [[김일성]]은 [[북한]]의 수도 [[평양]]에서 전면적인 철수 명령을 내렸다. [[10월 1일]]과 [[10월 2일]] 한국군과 유엔군이 잇따라 [[삼팔선|38도선]]을 넘어 북진하기 시작하였다. 이에 [[평양]]을 사수하던 [[조선로동당]]은 북한군과 함께 평양을 떠나 [[강계시|강계]]를 [[임시수도]]로 정하고 [[소련]]과 [[중국]]에 도움을 요청하였다. 소련의 [[스탈린]]은 직접 지원을 거절했지만 중국은 회의 끝에 개입을 결정한다. [[10월 9일]] 한국군과 유엔군은 평양을 탈환하기 위해 [[연천군]] 고랑포를 출발, [[황해도]]와 평양 주변의 북한군의 저항을 분쇄하고 있었다. 이 과정에서 [[백선엽]] 한국군 1사단장은 자신들의 목표가 평양이 아닌 [[해주시]]~[[남포시]]임을 알게 되어 밀번 1군단장을 찾아가 우리가 평양을 점령하겠다고 요청했고, 이에 미 전차중대 하나를 배속받아 본디 평양으로 진격하려던 미 24사단과 임무교대한다. 그리고는 [[10월 14일]] 신계를 거쳐 16일에 수안까지 도달한다. [[10월 17일]] 미 1군단의 양익을 맡은 미 1기병사단과 한국군 1사단은 북한군의 외곽방어선이 있는 황주∼율리선까지 진출하였고, 미 1군단은 [[10월 18일]]을 기해 평양 포위작전을 개시하기로 한다. 한편 한국군 1사단 15연대는 별도로 강동 쪽으로 우회해 [[대동강]] 북쪽 [[모란봉]] 방면으로 진격하고 있었고, 한국군 2군단 소속 6, 7, 8사단은 평양 동쪽에서 계속 북진 중이었다. 그런데 이 와중 미 1기병사단이 평양으로 육박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[[이승만]] [[대한민국 대통령|대통령]]은 [[정일권]] 참모총장에게 "무슨 일이 있더라도 평양만은 우리 국군이 먼저 점령하도록 하라."고 지시했고,[* 여기에 집착한 이유는 개전 초기 탈취된 서울 선봉 입성을 [[미합중국 해병대|미 해병대]]에게 빼앗긴 [[트라우마]]가 있었기 때문. 게다가 이 당시 한국군 1사단은 미 1군단에 배속돼 그들의 명령을 듣는 상태였기에 (즉, [[미군]] 소속인데다 그들이 멈추라면 멈출 수밖에 없는 처지였기에) 불안감을 키웠다.] 이에 정일권은 한국군 2군단에게 대통령의 뜻을 전달함으로서 한국군 7사단과 8사단이 평양 방면으로 방향을 튼다.[* 이 때 7사단 내에서도 유엔군 진격로를 이렇게 멋대로 바꿔도 되냐며 물었지만 [[유재흥]] 2군단장은 '평양을 먼저 따고 볼 것이다'라고 일축했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